문 앞에 쌓인 일주일치 상자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 복도. 502호 문 앞에 택배 상자가 세 개 쌓여 있었습니다.
"이 집은 요즘 사람이 안 사나…?"
옆집에 사는 이정화 씨(61세)가 중얼거렸습니다. 일주일 전, 택배 기사에게 대신 문을 열어준 기억이 났습니다. 그때 놓인 상자가 아직 그대로였습니다.
502호에는 72세 박영호 씨가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몇 년 전에 먼저 떠났고, 아들은 지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자녀는 자주 못 옵니다.
이 씨는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딩동."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눌렀습니다. 역시 조용했습니다.
순간, 뉴스에서 보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고독사.'
이 씨는 살짝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동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괜찮으세요?" 문이 열리던 날
그날 오후, 주민센터 직원과 동네 복지사가 함께 502호를 찾았습니다. 관리실 도움을 받아 문을 열었습니다.
박영호 씨는 침대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행히 의식은 또렷했습니다. 다만, 방 안 공기는 눅눅했고, 창문은 며칠째 닫힌 상태였습니다.
"박 선생님, 괜찮으세요?"
복지사가 물었습니다.
"아… 네. 며칠 몸이 안 좋아서요.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그냥 누워만 있었어요."
밥그릇이 싱크대에 쌓여 있었고, 전자레인지에는 다 먹지 못한 반찬이 남아 있었습니다. 휴대전화는 방 한쪽에 충전도 안 된 채 놓여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길어졌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구나.'
이 씨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박 씨는 쑥스러운 듯 웃었습니다.
"창피하네요. 이렇게 찾아오시게 해서."
복지사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창피하실 일 아닙니다. 혼자 계시니까 더 챙겨 드려야죠. 앞으로는 우리랑 조금만 더 자주 얼굴 보면서 지내보실래요?"
72세 박영호 씨가 만든 '혼자가 되지 않는 약속'
그날 이후, 박영호 씨의 일상에는 작은 변화들이 생겼습니다.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세 가지 약속이었습니다.
1) 하루에 얼굴 한 번은 꼭 보기
첫 번째 약속은 단순했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한 사람 얼굴은 직접 본다."
박 씨는 자신과 약속했습니다.
"마트에 가든, 복지관에 가든, 경비 아저씨랑이라도 한마디는 해야겠다."
처음에는 그마저도 귀찮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밖에 나가니, 복도에서 마주치는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안녕하세요. 오늘도 장 보러 가세요?"
짧은 인사였지만, 그날 하루가 덜 무거워졌습니다.
2) 일주일에 두 번, '정해진 장소' 가기
두 번째 약속은 '장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주민센터 복지사는 동네 경로당과 복지관 프로그램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박 씨는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나가 봐야 낯설고 불편할 것 같아요. 아는 사람도 없고."
이 때 이웃 이정화 씨가 말했습니다.
"처음 이틀만 같이 가 봐요, 아저씨. 제가 옆에 있을게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복지관 점심 식사였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정해진 시간에 가서 밥을 먹는 것. 약속은 그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밥을 먹다가 자연스럽게 한마디씩 오갔습니다.
"어르신은 어디 사세요?" "나는 저기 3동 702호." "아, 우리 동네 분이시네."
이름을 모르는 사이였지만, 함께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덜 외로웠습니다.
3) 한 달에 한 번, 먼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기
세 번째 약속은 가장 어려웠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내가 먼저 전화한다."
박 씨는 오래 연락하지 못한 누나, 군대 동기, 예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를 떠올렸습니다. 휴대전화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하나씩 찾아봤습니다.
"지금 전화하면 실례 아닐까?" "이런 나이가 돼서 갑자기 연락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망설임 끝에, 결국 누나에게 먼저 전화했습니다.
"누나, 나야." "어머, 영호야? 네 목소리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그럭저럭이지. 너는?"
전화를 끊고 나서 박 씨는 혼잣말을 했습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그냥 목소리만 들어도 좋구나."
그날 이후로 박 씨의 전화기 통화 내역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늘어난 이름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통화가 길지 않았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고독사 예방 공식? 숫자가 아니라 이름을 부르는 일
사람들은 종종 '고독사 예방 공식'을 묻습니다.
"일주일에 몇 번 나가야 하나요?" "하루에 몇 명을 만나야 고독사가 아닐까요?"
박영호 씨의 일상은 숫자로 설명되기 어려웠습니다. 대신, 이런 말이 더 어울렸습니다.
"아침에 눈 떴을 때, 오늘 내 얼굴을 봐 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가."
이웃 이정화 씨는 말합니다.
"뉴스에서 보는 고독사는 사실 숫자로 집계되는 사건이잖아요. 하지만 그 전에는, 얼굴이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이 있는 것 같아요. 동네에서 안 보이고, 복지관에서도 안 보이고, 모임에서도 빠지고… 그게 진짜 시작인 것 같아요."
고독사 예방은 거창한 정책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동네에서 이름을 한 번 더 불러 주는 일,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러 보는 일, 안부 전화를 한 번 더 거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고독사 예방 행동' 한 가지
고독사라는 말은 무겁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의외로 가볍습니다. 중요한 건, 그 행동을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만약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 복도에서 잘 보이던 어르신이 요즘 안 보인다면, 복지관이나 주민센터에 한 번 알려 보기
-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던 이웃에게 "요즘 잘 지내세요?" 한마디 더 건네 보기
- 오래 연락하지 않은 가족이나 친구에게 "문득 생각나서 전화했어"라고 먼저 연락해 보기
이 행동들은 뉴스에 나오지 않습니다.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연결들이 쌓이면, 누군가의 일주일이 달라집니다.
박영호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지금도 혼자 살아요. 그건 변한 게 없죠. 그런데 예전에는 '세상에서 혼자 남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혼자 살지만 그래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 차이가 커요."
Q. 주변에 고독사가 걱정되는 이웃이 보인다면 어떻게 하나요?
A.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동 주민센터나 복지관, 아파트 관리실 등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요즘 이 집이 걱정된다"는 정도만 알려도 됩니다. 담당 공무원이나 사회복지사가 안전 확인과 상담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문을 억지로 열거나, 혼자 판단해 책임을 지려고 하기보다는, 전문가에게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Q. 나 자신이 고립되는 느낌이 들 때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A. 거창한 모임을 찾기보다, "하루에 한 번 얼굴 보기",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장소 나가기" 같은 작은 약속부터 시작해 보세요. 동네 복지관, 주민센터 프로그램, 경로당, 성당·교회·사찰 등은 생각보다 문턱이 낮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가 보면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버티지 말고, 몸이나 마음이 힘들 때는 주변에 "요즘 좀 힘들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참고 자료
- 서울시 복지재단, 「1인 고령가구의 사회적 고립과 고독사 예방 방안 연구」 (2023)
- 보건복지부, 「지역사회 노인 고독사 예방을 위한 지자체 우수사례 모음」 (2022)
- 한국노년학회, 「노년기 사회적 관계망과 정신건강의 상관성」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