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첫날, 아내가 한 말
"당신, 이제 맨날 집에 있는 거야?"
2022년 2월, 제가 35년 다니던 회사를 퇴직한 날이었습니다. 아내는 저녁상을 차리다 말고 그렇게 물었습니다. 축하한다는 말도, 수고했다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까 아내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30년 넘게 낮에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게 된 겁니다. 아내에게도 퇴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새로운 동거가 시작됐습니다.
밥 먹자는 말이 싸움이 되던 시절
퇴직 후 석 달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사소한 일로 말다툼이 잦아졌습니다.
"점심 뭐 먹을까?"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뭔데?"
"그러니까 아무거나 해."
이런 대화가 반복됐습니다. 예전엔 저녁 한 끼만 같이 먹으면 됐는데, 이제는 아침, 점심, 저녁을 다 챙겨야 했습니다. 아내는 하루에 세 번씩 메뉴를 고민해야 했고, 저는 뭘 해도 눈치가 보였습니다.
티비 볼 때도 문제였습니다. 아내는 드라마를 보고 싶어 했고, 저는 뉴스를 틀었습니다. 리모컨 하나에 신경전이 붙었습니다. 35년 동안 못 싸운 걸 몰아서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 이러다 진짜 남남 되겠다."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아내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돈 문제가 터지다
관계가 흔들리니 돈 문제도 터졌습니다.
퇴직금은 생각보다 빨리 줄었습니다. 저는 친구들 모임에 나가면서 밥값, 술값을 썼고, 아내는 손주 용돈, 경조사비로 지출이 생겼습니다. 서로 쓴 돈을 모르니 불안했습니다.
"당신 또 모임 갔다 왔어? 돈이 남아도나?"
"당신은 손주한테 얼마나 쓴 건데?"
말이 오갈수록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뭘 하는지 모른다는 게 불안의 본질이었습니다.
우리가 찾은 방법
변화는 작은 약속에서 시작됐습니다.
먼저, 각자 통장을 하나씩 만들었습니다. 매달 연금이 들어오면 생활비는 공동 통장에, 나머지는 각자 통장에 넣기로 했습니다. 아내 용돈, 제 용돈을 따로 정했습니다. 금액은 똑같이. 30만 원씩.
"이건 내 돈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돈이 생기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같이 앉아서 지출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달 경조사비가 많았네", "다음 달엔 여행 가자" 같은 대화가 생겼습니다. 돈 이야기가 싸움이 아니라 계획이 됐습니다.
따로, 또 같이
관계도 손을 봤습니다.
제가 먼저 제안했습니다. 오전은 각자 시간, 오후는 같이 보내자고. 아내는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곧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오전에 동네 도서관에 갑니다. 신문 읽고, 가끔 책도 빌려옵니다. 아내는 집에서 드라마를 보거나 친구와 전화를 합니다. 점심은 각자 해결합니다. 저는 도서관 근처 김밥집에서 먹고, 아내는 집에서 간단히 먹습니다.
오후 3시쯤 집에 돌아오면 아내와 함께 동네 한 바퀴를 걷습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오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별거 아닌 대화입니다. "오늘 도서관에 새 잡지 들어왔더라", "친구가 손녀 자랑을 한 시간 했어".
그런데 이 시간이 생기고 나서 싸움이 확 줄었습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있으니까 만나면 반가웠습니다.
선배 부부에게 배운 것
작년 가을, 아내 친구 부부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 부부는 퇴직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비결이 뭐예요?" 아내가 물었습니다.
친구 남편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기대를 낮추는 거야. 젊을 때처럼 뭔가 해주길 바라면 안 돼. 옆에 있는 것만으로 고마운 거지."
친구 아내도 덧붙였습니다.
"우리도 처음 3년은 매일 싸웠어. 근데 어느 순간 깨달았어. 이 사람 아니면 누가 내 옆에 있겠나 싶더라고."
집에 오는 길에 아내가 말했습니다.
"우리도 10년 버티면 저렇게 되겠지?"
저는 아내 손을 잡았습니다. 오랜만이었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
퇴직 3년 차가 된 지금, 우리 부부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습니다. 가끔 말다툼도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게 있습니다. 싸우고 나서 먼저 말을 겁니다. "아까는 미안했어." 그 한마디가 어렵지 않게 나옵니다.
돈은 중요합니다. 연금이 얼마인지, 저축이 얼마 남았는지 늘 신경 씁니다. 하지만 돈만으로는 노후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걸 이제 압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 점심에 "뭐 먹을까?" 물어볼 사람이 있다는 것. 저녁에 오늘 하루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진짜 노후 자산입니다.
같은 방향을 보는 일
요즘 저는 가끔 아내에게 묻습니다.
"우리 내년에 뭐 하고 싶어?"
아내는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다고 합니다. 저는 기차 타고 전국 일주를 해보고 싶습니다. 둘 다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같이 계획을 세운다는 게 중요합니다.
퇴직 첫날, 아내가 물었습니다. "당신, 이제 맨날 집에 있는 거야?"
그때는 그 질문이 불안하게 들렸습니다. 지금은 다르게 들립니다.
"그래, 이제 맨날 같이 있는 거야."
그게 나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