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공허함은 다르다
외로움은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느낌입니다. 공허함은 다릅니다. 공허함은 '의미'가 사라졌다는 느낌입니다.
은퇴 후 많은 사람들이 이 공허함과 마주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도 할 일이 없습니다. 시간은 많은데 채울 게 없습니다. "나는 왜 살고 있지?"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공허함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벗어났을까요? 저는 다섯 명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봉사, 취미, 공부, 창업, 여행.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박미숙(62세) - 봉사활동으로 찾은 쓸모
"은퇴하고 나서 제일 힘들었던 게 '쓸모없다'는 느낌이었어요."
박미숙 씨는 30년간 은행원으로 일했습니다. 정년퇴직 후 1년간 집에만 있었습니다. 처음엔 좋았습니다. 쉬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6개월이 지나자 달라졌습니다.
"매일 똑같아요. 청소하고, 밥하고, TV 보고. 아무도 저를 필요로 하지 않더라고요. 회사 다닐 땐 누가 '박 과장님, 이거 좀 봐주세요' 했는데, 이젠 아무도 저를 안 찾아요."
그러던 중 동네 복지관에서 급식 봉사자를 모집했습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독거노인 급식을 준비하고 배달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 배달 갔을 때, 할머니 한 분이 그러시는 거예요. '아가씨, 고마워요. 덕분에 따뜻한 밥 먹어요'라고. 그 순간 울컥했어요. 아, 내가 누군가한테 필요한 사람이구나."
지금 박미숙 씨는 일주일에 두 번 봉사를 나갑니다. 급식 배달 외에도 복지관 행사 도우미, 노인 말벗 활동도 합니다. 한 달에 봉사 시간이 40시간이 넘습니다.
"돈은 한 푼도 안 받아요. 근데 이상해요. 회사 다닐 땐 월급 받았는데 공허했거든요. 지금은 돈 안 받는데 하루하루가 의미 있어요. 누군가를 돕는다는 게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2. 이동진(67세) - 손끝에서 피어난 취미
이동진 씨를 만난 곳은 도자기 공방이었습니다.
그는 물레 앞에 앉아 흙을 만지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서 컵 하나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거 제가 만든 거예요."
그는 선반에 놓인 그릇들을 보여줬습니다. 컵, 접시, 화분.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작품들이었습니다.
"퇴직 전엔 하루 종일 컴퓨터만 봤어요. IT 회사 개발자였거든요. 손으로 뭘 만져본 게 키보드가 전부였죠."
퇴직 후 우연히 문화센터 안내문을 봤습니다. '초보자를 위한 도자기 클래스.' 그냥 심심해서 신청했습니다.
"첫 수업 때 물레 돌리는데, 흙이 계속 삐뚤어지는 거예요. 짜증났죠. 근데 이상하게 계속 하고 싶더라고요. 다음 주가 기다려졌어요."
3개월 후 그는 자기 물레를 샀습니다. 집 베란다를 작은 공방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하루 2~3시간씩 도자기를 만듭니다.
"신기해요. 40년간 코드만 짰는데, 지금은 흙을 만져요. 전혀 다른 세계죠. 근데 이게 저를 채워줘요. 뭔가 만들어낸다는 게 이렇게 뿌듯한지 처음 알았어요."
그는 최근 지역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팔리지는 않았지만 괜찮았습니다. 과정 자체가 의미였으니까요.
3. 최순자(65세) - 늦깎이 학생의 열정
최순자 씨는 시니어 대학 한국사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 2시. 20명의 학생들이 모입니다. 모두 60~70대입니다. 강의실은 조용합니다. 다들 열심히 필기합니다.
"고등학교 때 역사를 정말 싫어했어요. 외울 게 많잖아요. 근데 지금은 제일 재밌어요."
최순자 씨는 평생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밤낮없이 바빴습니다. 공부할 시간이 없었죠. 퇴직하고 나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제 시간 많은데 뭐 배울까?'
"처음엔 영어 배우려고 했어요. 근데 영어학원 갔다가 좌절했죠.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가 너무 눈에 띄더라고요. 그래서 시니어 대학을 찾았어요."
시니어 대학은 달랐습니다. 나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편하게 공부했습니다. 틀려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모르면 다시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다시 배우는데, 이게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어요. 고구려 광개토대왕 이야기 들으면서 소름 돋았어요. 우리 역사가 이렇게 대단한데 왜 학교 다닐 땐 몰랐을까요?"
그녀는 이제 한국사 1년 과정을 끝내고 세계사를 시작했습니다. 집에는 역사책이 20권 넘게 쌓여 있습니다.
"공부가 이렇게 즐거운 줄 몰랐어요. 새로운 걸 알아간다는 게 제 하루를 채워줘요. 어제보다 오늘 더 똑똑해진 것 같은 느낌? 그게 좋아요."
4. 김태수(69세) - 작은 가게, 큰 의미
김태수 씨는 동네에 작은 카페를 열었습니다.
5평 남짓한 공간. 테이블 네 개. 메뉴는 커피와 샌드위치가 전부입니다. 하루 매출은 10만 원 정도. 남는 건 거의 없습니다.
"돈 벌려고 한 거 아니에요."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뭔가를 '운영'하고 싶었어요. 퇴직 전엔 회사에서 팀장이었거든요. 사람들 관리하고, 일정 짜고, 그런 거. 근데 퇴직하니까 아무것도 안 해요. 그게 답답했어요."
그는 퇴직금 일부로 작은 카페를 냈습니다. 아내는 반대했습니다. "그 나이에 무슨 장사냐"고. 하지만 그는 했습니다.
"아침 7시에 가게 문 열어요. 원두 갈고, 머신 돌리고, 테이블 닦고. 손님 오면 주문 받고, 커피 내리고. 바쁘죠. 근데 그게 좋아요. 뭔가 제가 돌아가는 느낌?"
단골손님들이 생겼습니다. 동네 할머니들, 학생들, 직장인들. "사장님, 오늘도 맛있어요" 하는 말 한마디가 그를 웃게 합니다.
"적자는 아니고 본전 정도 뽑아요. 근데 상관없어요. 이 가게가 제 하루를 만들어주거든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가게 가야지' 하는 이유가 생겨요. 그게 중요해요."
5. 정인호 부부(63세) - 전국 방방곡곡 우리의 여행
정인호 씨 부부는 캠핑카를 샀습니다.
중고 카니발을 개조한 작은 캠핑카. 그 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한 달에 보름은 여행 중입니다.
"우리 버킷리스트가 '대한민국 구석구석 가보기'예요."
정인호 씨가 말했습니다. 옆에서 아내 김영희 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직장 다닐 땐 여행 갈 시간이 없었어요. 연차 써서 해외여행 다녀오는 게 전부였죠. 근데 퇴직하고 나니까 시간은 많은데, 막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 TV에서 캠핑카 여행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겠는데?"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제주도 한 바퀴 돌았어요. 일주일 동안. 너무 좋더라고요. 아침에 눈 뜨면 바다가 보이고, 저녁엔 일몰 보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지금까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다녔습니다. 유명 관광지보다는 작은 마을을 좋아합니다. 재래시장 구경하고, 지역 음식 먹고, 현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눕니다.
"매일이 새로워요. 어제는 안동 하회마을 갔고, 오늘은 울릉도 가는 배 타고, 내일은 독도 갈 거예요. 이렇게 살다 보면 대한민국 전체를 다 돌겠더라고요."
아내 김영희 씨가 말했습니다.
"공허했던 게 채워진 것 같아요. 예전엔 '이제 뭐 하며 살지?' 했는데, 지금은 '다음엔 어디 갈까?' 해요. 똑같이 미래를 생각하는데, 느낌이 완전 달라요."
다섯 가지 방법 한눈에 보기
| 방법 | 사례 | 핵심 가치 | 시작 난이도 | 비용 |
|---|---|---|---|---|
| 봉사활동 | 박미숙(62세) | 쓸모, 기여 | 낮음 | 무료 |
| 취미 | 이동진(67세) | 창조, 몰입 | 중간 | 월 10~30만원 |
| 공부 | 최순자(65세) | 성장, 배움 | 낮음 | 무료~10만원 |
| 창업 | 김태수(69세) | 운영, 책임 | 높음 | 수백~수천만원 |
| 여행 | 정인호 부부(63세) | 탐험, 자유 | 중간 | 월 100~300만원 |
공통점: 의미를 찾았다
다섯 사람은 각기 다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의미'를 찾았습니다.
박미숙 씨는 봉사를 통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이동진 씨는 도자기를 통해 "창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최순자 씨는 공부를 통해 "성장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김태수 씨는 카페를 통해 "운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정인호 부부는 여행을 통해 "탐험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찾았습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돈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의미가 우리를 살게 한다고 했죠. 은퇴 후 공허함은 바로 이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직장은 우리에게 의미를 줬습니다. "나는 일하는 사람",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미. 그게 사라지면 공허함이 옵니다.
하지만 의미는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일이 아니어도 됩니다. 봉사, 취미, 공부, 창업, 여행. 무엇이든 좋습니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나는 OO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다섯 가지 방법 중 정답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가 맞고, 어떤 사람은 취미가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가 맞고, 어떤 사람은 창업이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이 맞습니다.
중요한 건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공허하다면, 그냥 앉아서 기다리지 마세요. 뭐라도 해보세요. 동네 복지관 가서 봉사 신청해보세요. 문화센터 가서 취미 수업 들어보세요. 시니어 대학 알아보세요. 작은 가게 내볼 생각해보세요. 여행 계획 세워보세요.
처음엔 어색할 겁니다.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다른 걸 해보세요. 박미숙 씨도 처음엔 영어 배우려다가 봉사로 바꿨습니다. 시도하다 보면 내게 맞는 게 나타납니다.
공허함은 비어있는 게 아닙니다. 채워지길 기다리는 공간입니다. 당신이 선택한 의미로 그 공간을 채우세요.
자주 묻는 질문
Q.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해도 될까요?
A. 물론입니다. 오히려 권장합니다. 평일엔 봉사하고 주말엔 취미 생활 하는 식으로 조합할 수 있습니다. 단, 처음부터 너무 많은 걸 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하나씩 시작해서 점차 늘려가세요. 중요한 건 과부하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Q. 비용이 부담스러운데 어떻게 하나요?
A. 봉사활동과 공부는 거의 무료입니다. 복지관, 도서관, 시니어 대학 프로그램 대부분이 무료거나 소액입니다. 취미도 문화센터 강좌는 월 5~10만 원 정도로 부담 없습니다. 여행도 캠핑카 대신 국내 저렴한 숙소를 이용하면 됩니다. 돈이 많이 드는 건 창업 정도인데, 이것도 작게 시작하면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2024년 9~10월 필자가 직접 인터뷰한 5명의 은퇴자 사례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인터뷰이의 요청에 따라 일부 실명과 구체적 장소는 가명 처리했으며, 주요 내용은 실제 경험을 충실히 반영했습니다.
- 빅터 프랭클, "Man's Search for Meaning" (의미를 찾는 인간)
- 보건복지부, "노인 사회참여 활성화 방안 연구" (2023)
최종 작성: 2024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