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5일, 인사팀에서 퇴직 예정일 통보를 받았습니다. 정확히 1년 후였어요.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렸죠. 365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엔 막연했어요. 뭘 준비해야 할까? 돈? 건강? 취미? 다 중요해 보였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7단계 체크리스트를 만들었어요. 하나씩 체크하면서 1년을 보냈고, 덕분에 은퇴 후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1단계: 재정 현황 파악하기 (D-365일~D-300일)
가장 먼저 한 일은 통장을 전부 꺼내놓는 거였어요. 주거래 은행, 인터넷 은행, 증권 계좌, 심지어 10년 동안 안 쓴 통장까지요. 노트 한 권을 펴고 모든 자산을 적었습니다.
예금: 3,200만 원. 퇴직금 예상액: 8,500만 원. 주식: 1,200만 원(평가액). 부동산: 아파트 한 채(대출 잔액 4,000만 원). 국민연금 예상 수령액: 월 72만 원. 적어놓고 보니까 생각보다 적더라고요. "이걸로 30년을 살아야 하나?" 싶었죠.
그다음엔 부채를 정리했습니다. 주택담보대출 4,000만 원, 신용대출 500만 원. 이자만 매달 30만 원씩 나가고 있었어요. 은퇴 전에 신용대출부터 갚기로 했습니다. 매달 50만 원씩 넣어서 10개월 만에 완납했어요. 이자 부담이 줄어드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숫자를 직면하는 것'이에요. 피하지 말고 정확히 보세요. 그래야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2단계: 생활비 시뮬레이션 (D-300일~D-240일)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 동안 '은퇴 후 생활비'로 살아봤습니다. 월급은 그대로 받지만, 지출을 은퇴 후 수준으로 맞춰본 거예요. 목표 생활비는 월 200만 원으로 잡았어요.
먼저 차를 팔았습니다. 할부금, 보험료, 주유비, 주차비... 다 합치면 월 60만 원이 들어갔거든요. 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했더니 한 달에 5만 원이면 충분했어요. 55만 원 절약.
식비도 조정했습니다. 외식을 주 1회로 줄이고, 집에서 밥을 해먹었어요. 아내와 같이 장을 보러 다니면서 할인 제품 위주로 샀죠. 식비가 월 80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줄었습니다.
통신비는 요금제를 바꿨어요. 무제한 데이터가 필요 없더라고요. 와이파이만 잘 쓰면 되니까요. 월 12만 원에서 6만 원으로 내려갔습니다.
3개월 시뮬레이션 결과, 실제 생활비는 월 195만 원이 들었어요. 목표에 딱 맞았죠. 이 경험 덕분에 은퇴 후에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익숙한 패턴이었으니까요.
3단계: 건강검진 스케줄 잡기 (D-240일~D-210일)
7월에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회사에서 매년 받던 건강검진이 은퇴 후엔 없으니까요. 혈압이 조금 높게 나왔어요. 의사 선생님이 "지금부터 관리하면 괜찮아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치과도 갔습니다. 스케일링하고, 충치 두 개 때웠어요. 임플란트 상담도 받았는데, 한 개에 150만 원이라더군요. "지금 하면 회사 보험 혜택 받을 수 있어요"라는 말에 바로 진행했습니다. 은퇴 후엔 전액 본인 부담이니까요.
안과 검진도 받았어요. 백내장 초기 증상이 있다고 해서 3개월마다 경과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건강검진 비용으로 총 230만 원 들었지만, 나중에 병원비로 몇백만 원 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어요. 예방이 최고의 절약입니다.
4단계: 주거 계획 점검하기 (D-210일~D-180일)
8월에 아내와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집에서 계속 살까?" 우리 집은 방 3개짜리 아파트였어요. 아이들은 다 독립했고, 우리 둘만 사는데 너무 넓었죠. 관리비도 월 25만 원씩 나왔고요.
다운사이징을 고려했습니다. 방 2개짜리로 이사하면 관리비도 줄고, 전세 차액으로 생활비도 마련할 수 있겠더라고요. 부동산도 몇 군데 다녀봤어요.
하지만 결론은 '현재 집 유지'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어요. 동네 인프라가 너무 좋았거든요. 병원, 공원, 문화센터 다 걸어서 10분 거리. 나이 들수록 인프라가 중요하다는 말이 실감났어요.
대신 집을 리모델링했습니다. 욕실에 안전바를 달고, 문턱을 낮추고, 조명을 밝게 바꿨어요. 총 300만 원 들었는데, 집이 훨씬 살기 편해졌습니다.
5단계: 관계 정리 및 확장하기 (D-180일~D-120일)
9월부터 11월까지는 사람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퇴직하면 회사 동료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잖아요. 그럼 누구랑 시간을 보낼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먼저 오래된 친구들에게 연락했습니다. 20년 동안 안 만난 대학 동기, 군대 전우... 카톡으로 안부 묻고, 밥 한 끼 먹자고 했어요. 생각보다 다들 반가워했습니다. "우리도 곧 은퇴인데 미리 연습 좀 하자"면서요.
동호회도 알아봤어요. 구청 평생학습관에서 하는 '시니어 사진반'에 등록했습니다. 월 2만 원. 첫 수업 날 가니까 다들 비슷한 나이대더라고요. 금방 친해졌죠.
봉사활동도 시작했어요. 동네 무료급식소에서 월 2회 배식 봉사. 처음엔 쑥스러웠는데, 하다 보니까 보람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한마디가 이렇게 뿌듯할 줄 몰랐습니다.
은퇴 후 가장 무섭다는 게 외로움이래요. 그래서 미리 사람을 만나는 연습을 한 거죠. 덕분에 은퇴 후에도 매주 약속이 있습니다.
6단계: 새로운 일상 설계하기 (D-120일~D-60일)
12월부터 2월까지는 '은퇴 후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회사 다닐 때는 아침 7시 기상, 출근, 퇴근, 저녁... 자동으로 돌아갔잖아요. 근데 은퇴하면? 24시간이 다 내 시간이에요. 그게 자유일 수도, 무료함일 수도 있더라고요.
저는 주간 스케줄을 짰습니다.
월요일: 아침 산책 1시간, 사진반 수업 오후 2시
화요일: 집안일, 도서관 가서 책 읽기
수요일: 운동(헬스장 또는 수영장)
목요일: 봉사활동, 친구 만나기
금요일: 자유 시간(취미 활동)
토요일: 아내와 데이트(영화, 외식)
일요일: 가족 시간, 휴식
일주일 스케줄이 딱 정해지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오늘 뭐하지?" 하는 고민이 없어졌어요. 물론 융통성은 있어야죠. 날씨 나쁘면 바꾸고, 갑자기 약속 생기면 조정하고요.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는 일'로 채우는 겁니다. 억지로 뭔가 하면 스트레스예요. 저는 사진 찍는 게 좋으니까 월요일마다 카메라 들고 나가요. 그게 제 낙이에요.
7단계: 마음 준비하기 (D-60일~D-1일)
마지막 두 달은 마음 정리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여기가 제일 어려웠어요. 35년 다닌 회사를 떠난다는 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정체성이 흔들리더라고요.
"나는 누구지? 회사 없으면 뭐가 남지?"
퇴직 한 달 전쯤,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밤에 잠도 안 왔습니다. 아내한테 털어놨더니 "당신은 회사원이기 전에 남편이고, 아빠고, 당신 자신이잖아"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위로가 됐어요.
퇴직 2주 전, 동료들과 작은 송별회를 했습니다. 다들 "수고했어", "건강해" 이런 말 해주더라고요. 울컥했죠. 35년이 스쳐 지나갔어요. 그날 밤 집에 와서 일기를 썼습니다.
"2024년 3월 1일. 내일이면 은퇴다.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회사에 감사하고, 나 자신에게도 감사하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마지막 출근 날,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았어요. 내 자리, 회의실, 복도... 다 눈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문을 나섰어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앞만 보고 걸었죠.
은퇴 후 6개월, 지금은 어떤가요?
은퇴하고 6개월이 지났습니다.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어요. 생활비는 계획대로 월 200만 원 안쪽으로 유지되고, 건강도 괜찮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가장 좋은 건 시간이 내 것이라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뭐하지?" 할 때, 그게 부담이 아니라 설렘이에요. 사진 찍으러 갈까? 친구 만날까? 책 읽을까? 선택할 수 있다는 게 행복입니다.
물론 완벽하진 않아요. 가끔 회사 생각 날 때도 있고, 돈 걱정될 때도 있어요. 하지만 1년 전부터 준비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준비한 만큼 안정적이에요.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은퇴 1년 전이라면,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하루하루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다 보면, 어느새 준비가 완료됩니다. 돈만 준비하지 마세요. 건강, 관계, 일상, 마음... 다 준비해야 해요.
은퇴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제2의 인생이죠. 준비한 사람에겐 축복이고, 준비 안 한 사람에겐 시련이에요. 당신은 어떤 은퇴를 원하십니까?
오늘부터 시작하세요. 1년 후의 당신이 고마워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