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이름이 자꾸 생각나지 않던 날
72세 가을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뭔가를 하려고 거실로 나왔다가 ‘내가 왜 나왔지?’ 하는 순간이 하루에 몇 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멍하니 서 있는 일이 잦아졌고, 오래 알고 지낸 이웃 이름이 목 끝까지 올라오다가도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날은 특히 심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이웃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형님, 저 기억 안 나요? 같이 파크골프 치던…”
분명히 얼굴은 아는데, 이름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애써 웃으며 얼버무리고 집에 올라왔지만, 마음 한구석이 싸하게 식었습니다.
‘이게 그냥 나이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한참을 뒤척였습니다.
“검사해 보자”라는 한마디
아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요즘 이상해. 자꾸 이름이 생각이 안 나. 방에 들어가서 왜 들어왔는지도 까먹고.” 아내는 잠시 제 얼굴을 보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럼 검사 한 번 해봐요. 괜히 혼자 겁먹지 말고.”
일주일 뒤, 동네 병원에서 간단한 인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의사는 결과지를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치매 단계는 아닙니다. 다만, 나이와 함께 오는 자연스러운 기억력 저하는 있으신 것 같아요. 지금부터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5년, 10년이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약 처방도 있었지만, 의사는 약보다 더 먼저 말했습니다.
“하루에 10분이라도 좋으니까, 뇌를 깨우는 루틴을 한 가지 정해 보세요. 손을 쓰고, 눈을 쓰고, 입으로 말하는 걸 함께 하는 게 좋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가 물었습니다. “당신, 뭘 해보고 싶어요?” 그 질문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처음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처음엔 너무 거창하게 시작했습니다. “영어 단어 하루에 30개씩 외워야지.” 문구점에서 단어장을 사와, 첫 장에 크게 적었습니다. “DAY 1. 30 WORDS”
첫날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단어장을 넘기며 입으로 소리 내서 따라 읽었습니다. 둘째 날부터 단어 수가 헷갈리기 시작했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단어장이 서랍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역시 나는 안 되나 보다.” 실패가 아니라, 시작이 잘못됐다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이 든 내가 매일 할 수 있는 양이 아니라, 마음만 앞선 20대 기준으로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하루 딱 10분이라면 어떨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기준을 바꾸었습니다.
“멋있는 루틴이 아니라, 지겨워도 할 수 있는 루틴으로 해보자.”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10분 루틴’입니다. 이름을 붙였습니다. “아침 10분, 내 머릿속 산책”.
구조는 아주 단순합니다. 아침밥 먹기 전에, 작은 책상에 앉아 타이머를 10분으로 맞춥니다.
먼저 3분은, 전날 있었던 일을 공책에 적습니다. “어제는 시장에 갔다. 감자 두 봉지랑, 사과 한 봉지를 샀다. 영수 형한테 전화가 왔다.” 글씨를 잘 쓰려고 애쓰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손을 움직였습니다.
다음 4분은, 짧은 글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신문 기사의 짧은 칼럼이 될 때도 있고, 손주가 초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꺼내 읽을 때도 있습니다. 입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 머릿속이 조금 더 또렷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3분은, 숫자 놀이를 합니다. 오늘 날짜를 기준으로 숫자를 조합해 보거나, ‘7의 배수를 거꾸로 세기’ 같은 놀이를 혼자 해봅니다. 때로는 휴대폰 메모장에 오늘 떠오른 사람 이름 세 개를 적어 두고, 잠들기 전에 다시 떠올려 보는 식으로 응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정확히 10분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매일 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첫 달은 솔직히 귀찮았다
첫 일주일은 신기했습니다. 타이머에서 “띵” 소리가 날 때마다,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열흘쯤 지나자, 슬슬 귀찮아졌습니다.
어느 날은 TV 뉴스를 보다 말고,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 뭐.”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아내가 옆에서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 오늘 머릿속 산책 안 했잖아요.” “귀찮아…” “10분이면 커피도 하나 못 마셔요. 그냥 앉았다가 일어나요.”
결국 다시 책상에 앉았습니다.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연필을 잡고 어제 있었던 일을 적다 보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10분은 기억력만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 같은 것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세 달이 지나자, 작은 변화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루틴을 시작한 지 세 달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아내와 시장에 갔다가, 장바구니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사 온 것들, 메모 안 봐도 말할 수 있나?’ 머릿속으로 천천히 떠올려 보았습니다.
감자, 양파, 두부, 마늘, 콩나물, 사과. 생각보다 잘 떠올랐습니다. 예전 같으면 봉투를 열어봐야 했을 겁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손주가 집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아버지, 나 지난번에 말한 연극반 기억나요?” 예전 같았으면 “어? 그랬니?” 하고 다시 물어봤을 텐데, 그날은 자연스럽게 대답이 나왔습니다.
“어, 학교에서 연극 한다고 했잖아. 그거 준비 잘 돼가?” 손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걸 기억해요?” 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요즘 머릿속 산책을 하거든.”
그날 밤, 공책을 펼쳐보니 세 달 동안의 글이 빼곡했습니다. 날짜 옆에 적힌 사소한 일들. “오늘은 버스를 타고 노들섬에 갔다.” “오늘은 영수 형과 통화했다.” “오늘은 손주가 시험이 끝났다고 했다.”
기억력이 조금씩 돌아온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인생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 고마웠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가끔 잊어버린다
솔직히 말하면, 10분 루틴이 기적을 만든 건 아닙니다. 지금도 가끔 사람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방에 들어갔다가 ‘어, 뭐 가지러 왔더라’ 하고 멈칫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겁이 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나는, 매일 아침 10분 동안 내 머리를 쓰고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 10분이 쌓여, 나머지 23시간 50분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내도 말합니다. “예전보다 덜 날카로워졌어요. 자꾸 깜빡한다고 짜증내던 모습이 줄었어요.” 아마도 기억력만 좋아진 것이 아니라, ‘기억을 붙잡으려 발버둥 치던 마음’이 조금 편안해져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10분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 글을 쓰는 지금, 저는 내일 아침에 쓸 공책을 미리 펼쳐 두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연필 한 자루와 작은 모래시계가 놓여 있습니다.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내일도 저는 어제의 나를 적고, 한 단락을 소리 내어 읽고, 숫자놀이를 잠깐 하게 될 겁니다.
이 루틴이 모든 사람에게 꼭 맞는 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는 10분이 더 잘 맞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시를 외우는 10분이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같은 70대로서 이런 마음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아직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 기억을 조금이라도 오래 붙잡기 위해, 각자에게 맞는 10분짜리 다리가 하나씩 생기면 좋겠습니다.
혹시 요즘 나와 비슷한 걱정을 하고 계시다면, 언젠가 당신만의 10분도 찾아가시길, 먼저 10분을 시작해 본 동료로서, 조용히 그렇게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