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침묵으로 가득한 집
박정호 씨(68세)와 아내 김미숙 씨(66세)는 결혼 40년차 부부입니다.
저녁 6시. 박정호 씨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다녀왔어."
"응."
김미숙 씨가 부엌에서 대답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박정호 씨는 거실로 갔습니다. TV를 켰습니다. 뉴스가 나왔습니다. 소파에 앉아서 봤습니다.
김미숙 씨는 저녁을 차렸습니다. "밥 먹어요." 둘이 마주 앉았습니다. 밥을 먹었습니다. 조용했습니다.
"국 맛있네."
"..."
김미숙 씨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났습니다. 박정호 씨는 다시 TV 앞으로 갔습니다. 김미숙 씨는 설거지를 했습니다. 각자 시간을 보냈습니다.
밤 10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잘자." "응." 불을 껐습니다.
하루가 이렇게 끝났습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내일도 그럴 겁니다.
"우리 대화가 없었어요. 필요한 말만 했어요. '밥 먹어', '나갔다 올게', '잘자'. 그게 전부였어요."
박정호 씨가 말합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에요. 젊었을 땐 얘기도 많이 하고 데이트도 했어요. 근데 애들 키우고 살림하고 회사 다니고 하다 보니까... 언제부턴가 대화가 없어졌어요."
딸의 한마디
2023년 2월. 설날에 딸이 집에 왔습니다.
저녁을 먹었습니다. 딸이 부모님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엄마. 두 분 대화가 없으시네요."
"뭐?"
"아까부터 봤는데 서로 한마디도 안 하시잖아요. 옛날엔 안 그러셨는데."
박정호 씨와 김미숙 씨는 서로를 봤습니다. 딸의 말이 맞았습니다.
"우리가 그랬나?"
"응. 아빠는 TV만 보시고, 엄마는 혼자 설거지하시고. 뭔가 쓸쓸해 보였어요."
그날 밤. 박정호 씨는 잠이 안 왔습니다. 딸의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우리 대화가 없구나. 같이 살지만 따로 사는 것 같구나.'
아내를 봤습니다. 자고 있었습니다. 40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아내가 뭘 생각하는지 몰랐습니다. 아내도 자기가 뭘 생각하는지 모를 겁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우리 대화 좀 합시다"
다음 날 아침. 박정호 씨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대화 좀 합시다."
"갑자기 왜?"
"어제 딸이 한 말 생각해보니까 맞는 것 같아요. 우리 요즘 대화가 없어요."
김미숙 씨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남편 말이 맞았습니다.
"그러게요. 우리 언제부터 이랬지?"
"모르겠어요. 근데 이제라도 바꿔봅시다. 매일 저녁 8시에 30분씩 대화하는 거 어때요?"
"30분씩?"
"네. TV 끄고, 차 마시면서, 그날 있었던 일 얘기하는 거예요."
김미숙 씨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아요. 해봅시다."
첫 번째 대화 시간, 2023년 2월 14일
저녁 8시. 박정호 씨가 TV를 껐습니다. 김미숙 씨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차 마실까요?"
"네."
김미숙 씨가 차를 끓였습니다. 둘이 식탁에 마주 앉았습니다. 차를 마셨습니다.
침묵.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너무 오래 대화하지 않아서 어색했습니다.
박정호 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뭐 했어요?"
"집안일하고, 시장 갔다 왔어요. 당신은?"
"친구들이랑 당구 쳤어요."
"누구랑요?"
"철수, 영호. 고등학교 친구들."
"아, 그 친구들. 오랜만에 만났네요."
"응. 재미있었어요. 철수가 요즘 손주 돌보느라 정신없대요."
"손주가 몇 살이에요?"
"세 살인가? 장난꾸러기래요."
조금씩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어색했지만 계속했습니다.
30분이 지났습니다. 많은 얘기를 한 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그래요. 내일 또 해요."
첫 번째 대화 시간이 끝났습니다.
1주일 후, 조금씩 익숙해지다
매일 저녁 8시. 박정호 씨가 TV를 껐습니다. 김미숙 씨가 차를 끓였습니다. 둘이 식탁에 앉았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조금 익숙해졌습니다.
"오늘은 뭐 했어요?"
"복지관 갔다 왔어요. 요가 수업 들었어요."
"요가요? 언제부터 했어요?"
"두 달 전부터요. 몰랐어요?"
"몰랐네요. 재미있어요?"
"네. 몸도 가벼워지고 좋아요. 당신도 해볼래요?"
"나는 당구가 더 좋아요."
둘이 웃었습니다.
박정호 씨는 깨달았습니다. 아내가 요가를 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2개월 동안 매주 복지관에 다녔는데 몰랐습니다.
'우리 정말 대화가 없었구나.'
1개월 후, 대화 주제가 생기다
2023년 3월. 대화 루틴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이제 매일 저녁 8시가 기다려졌습니다. 낮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저녁에 이거 얘기해야지'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여보, 오늘 시장에서 이상한 일 봤어요."
"뭔데요?"
"할머니 한 분이 귤 한 박스를 사셨는데, 돈이 모자란 거예요. 그래서 옆에 있던 젊은 분이 돈을 대신 내주더라고요."
"진짜요? 착하네요."
"그러게요.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사소한 일상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았습니다.
박정호 씨도 얘기했습니다.
"나는 오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어요."
"어머, 당신이 책을? 무슨 책인데요?"
"역사책이요. 조선시대 이야기."
"갑자기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TV에서 사극 보다가 진짜 역사가 궁금해졌어요."
"재미있어요?"
"네. 생각보다 재미있어요. 다 읽으면 당신도 한번 읽어봐요."
김미숙 씨는 놀랐습니다. 남편이 책을 읽는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40년을 살았지만 책 읽는 남편은 처음 봤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몰랐을까.'
Q. 대화 주제가 없으면 어떡하나요?
A. 처음엔 누구나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대화하려니 어색하고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합니다. 간단한 주제부터 시작하세요. "오늘 뭐 했어?", "점심 뭐 먹었어?", "날씨 좋네" 같은 일상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면 됩니다. 중요한 건 주제의 깊이가 아니라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시간 자체입니다. 1~2주 지나면 자연스럽게 얘기거리가 생깁니다.
3개월 후, 더 깊어진 대화
2023년 5월. 대화 루틴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 대화가 깊어졌습니다. 일상 얘기를 넘어서 감정과 생각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여보, 나 요즘 걱정이 있어요."
"무슨 걱정인데요?"
"건강이요. 요즘 무릎이 자꾸 아파요. 나이가 드니까 이것저것 아프네요."
"병원 가봤어요?"
"아직요. 괜찮겠지 하고 미뤘어요."
"내일 같이 가요. 나도 검진 받아야 하거든요. 같이 가서 확인합시다."
"그럴까요?"
"네. 건강이 중요해요."
김미숙 씨는 고마웠습니다. 예전 같으면 혼자 걱정하다가 끝냈을 겁니다. 남편한테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근데 이제는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박정호 씨도 얘기했습니다.
"나도 사실 걱정이 있어요."
"뭔데요?"
"앞으로 우리 둘이 어떻게 살아갈까. 나이가 드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나요. 아프면 어쩌나, 돈은 괜찮을까, 애들한테 짐 되는 거 아닐까."
"나도 그런 생각해요. 자주."
"그렇죠? 근데 당신이랑 이렇게 얘기하니까 좀 나아지는 것 같아요.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맞아요. 나도 그래요."
둘이 손을 잡았습니다. 오랜만에 잡는 손이었습니다. 따뜻했습니다.
6개월 후, 완전히 달라진 관계
2023년 8월. 대화 루틴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박정호 씨와 김미숙 씨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매일 저녁 8시는 이제 둘만의 특별한 시간이 됐습니다. TV도 안 봅니다. 전화도 안 받습니다. 오직 둘이서만 대화합니다.
대화 주제도 다양해졌습니다. 일상 얘기, 걱정거리, 꿈, 추억, 계획. 무슨 얘기든 나눴습니다.
어느 날 저녁.
"여보, 나 당신한테 미안한 게 있어요."
"뭔데요?"
"결혼 초에 당신한테 너무 소홀했어요. 일 핑계로 집에 늦게 들어오고, 당신 얘기 안 들어주고. 생각해보니 미안하더라고요."
김미숙 씨는 놀랐습니다. 남편이 이런 얘기를 하다니.
"나도 미안한 게 있어요. 당신한테 짜증 많이 냈잖아요. 애들 키우느라 힘들어서 당신한테 화풀이했어요."
"괜찮아요. 다 지나간 일이에요."
"그래도 미안해요."
"나도 미안해요."
40년 만에 하는 사과였습니다. 늦었지만 필요한 사과였습니다.
박정호 씨가 말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우리 잘 살아요. 서로 의지하면서."
"그래요. 같이 잘 살아요."
1년 후, 2024년 2월
대화 루틴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딸이 집에 왔습니다. 설날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었습니다. 딸이 부모님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엄마. 두 분 뭔가 달라지셨어요."
"뭐가?"
"표정이요. 밝아지셨어요. 그리고 서로 자주 얘기하시잖아요. 작년엔 안 그러셨는데."
박정호 씨와 김미숙 씨가 서로를 봤습니다. 웃었습니다.
"우리 요즘 매일 대화해요. 저녁 8시마다."
"진짜요? 대박. 어떻게 하시는데요?"
"그냥 차 마시면서 30분 동안 그날 있었던 일 얘기해요. 간단하죠?"
"와, 부럽다. 나도 남편이랑 그렇게 해야겠어요."
딸이 부러워했습니다. 박정호 씨는 뿌듯했습니다.
'작년 이맘때 딸이 한 말 덕분에 우리가 바뀌었구나.'
대화 루틴이 준 것들
박정호 씨가 말합니다.
"하루 30분 대화가 우리 결혼 40년을 바꿨어요. 세 가지가 달라졌어요."
첫째, 서로를 다시 알게 됐다
"40년을 살았지만 아내를 제대로 몰랐어요. 아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걱정하는지, 뭘 바라는지. 대화하면서 다시 알게 됐어요. 아내도 저를 다시 알게 됐고요."
둘째, 외롭지 않다
"예전엔 같이 살아도 외로웠어요. 각자 따로 시간을 보냈거든요. 지금은 안 외로워요. 매일 저녁 8시에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요.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어요."
셋째, 남은 인생이 기대된다
"예전엔 앞으로 뭘 하며 살까 막막했어요. 그냥 늙어가는 것 같았어요. 지금은 달라요. 아내와 함께 할 일이 많아요. 같이 여행도 가고 싶고, 취미도 같이 하고 싶고. 남은 인생이 기대돼요."
Q. 배우자가 대화를 거부하면 어떡하나요?
A. 처음엔 어색하거나 거부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리하게 설득하지 마세요. 대신 "5분만 얘기해봐요", "차 한잔 같이 마셔요" 같이 부담 없는 제안으로 시작하세요. 첫날은 5분, 다음엔 10분, 이렇게 조금씩 늘려가면 됩니다. 중요한 건 강요가 아니라 초대입니다. 1~2주 지나면 배우자도 이 시간을 기다리게 될 겁니다.
당신도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혹시 배우자와 대화가 없으십니까? 같이 살지만 외롭습니까? 각자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박정호 씨 부부처럼 시작해보세요. 오늘 저녁부터.
복잡하지 않습니다. 매일 30분, TV를 끄고, 마주 앉아서,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김미숙 씨가 말합니다.
"처음엔 어색했어요. 뭘 얘기해야 할지 몰랐어요. 근데 일주일만 지나면 자연스러워져요. 한 달 지나면 이 시간이 기다려져요. 1년 지나면 이 시간 없이는 못 살아요."
결혼 생활이 무료하십니까? 권태기입니까? 늦지 않았습니다.
박정호 씨 부부는 결혼 40년차에 시작했습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8시. 배우자에게 말해보세요.
"여보, 우리 차 한잔 하면서 얘기 좀 할까요?"
그 한마디가 당신의 결혼 생활을 바꿀 겁니다. 박정호 씨 부부처럼.
참고 자료
- 박정호 씨(가명, 68세), 김미숙 씨(가명, 66세) 부부 인터뷰 (2024년 9월)
- 한국가족관계학회, "노년기 부부 의사소통과 결혼만족도 연구" (2023)
-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중년 이후 부부관계 변화 연구" (2024)